남들이 그린 선을 ‘폴짝’ 뛰어넘는 청춘에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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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하는’ 복학생의 고군분투 담은 영화 <족구왕>
우문기 감독
남들이 그린 선을 ‘폴짝’ 뛰어넘는 청춘에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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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토익 몇 점이야?”
“본 적 없는데요.”
“공무원 시험 준비해. 학점은?”
“이쩜….”
“공무원 시험 준비해.”
막 제대 후 대학에 돌아간 복학생 만섭(안재홍)은 기숙사 방을 함께 쓰는 과 선배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해”라는 말만 듣는다. 학교의 학생들은 두꺼운 책을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영어회화를 가르치려는 외국인 교수에게 “토익 영어나 공부하자”고 한다. 하지만 만섭의 관심은 오로지 족구뿐. 군대 간 사이에 학교에 족구장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서 그는 족구장 건립에 앞장선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족구를 하지 않고, 여학생들은 족구하는 복학생을 호환마마보다도 혐오한다. 학생과 교직원은 그가 족구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이런 반응을 보인다.
“족구하는 소리하고 있네.”(빨리 읽어보지 말자.)
<족구왕>(감독 우문기)은 ‘족구하는’ 청춘영화다. ‘88만원 세대’가 등장한 이후, 청춘영화는 이 세대의 슬픔과 아픔을 이야기했다. 거기엔 기성 세대에 대한 원망, 분노나 자조가 섞여 있었고, 그중에는 신세한탄이나 어리광에 그치는 것들도 있었다. 청춘영화이되 청춘다운 것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족구왕’은 순도 100%의 청춘영화다. 등록금과 취업이란 문제로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하는 영화와 달리 ‘족구왕’은 이 선 밖으로 삐져 나간다. 그것도 격렬한 저항의 몸짓으로 뛰쳐 나가는 게 아니라 ‘어차피 남들이 그려놓은 이런 선 따위야’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폴짝 뛰어넘는다. 애당초 청춘이란 게 이런 것이다.
우문기(31) 감독은 “제대 후 복학했을 때 내 모습을 떠올렸다. 학교에 아는 사람도, 아는 것도 없었다. 그새 나이는 더 먹어서 고민은 더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애가 하고 싶었다”고 했다. “청춘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아요. 등록금 때문에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고시공부에 매진하는 친구들이 있죠. 저도 토익 공부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친구들도 애인한테 차여서 울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열성적으로 따라다니기도 해요. 저의 대학 시절 가장 큰 고민은 아무래도 여자, 연애였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 기억 속 청춘은 열정과 사랑이에요. 청춘에는 어두운 면이 있지만 밝은 면도 있어요. 청춘의 양면을 제가 느낀 비중으로 담으려고 했어요.”
만섭은 같은 과 친구 창호(강봉성)와 미래(황미영)와 팀을 이뤄 교내 체육대회에 나간다. 만섭은 학교에서 가장 예쁜 안나(황승언)을 좋아하고, 만섭의 라이벌은 안나의 남자친구이자 전직 국가대표 축구 선수인 강민(정우식)이다. 만섭과 강민, 둘 중에서 체육대회에서 이기는 자가 족구왕이다. 무엇이든 ‘왕(王)’자가 붙은 것은 다 좋지만 족구왕은 예외다. 주식왕, 토익왕, 축구왕 등 ‘왕’으로 끝나는 것들에는 부와 명예가 따른다. 하물며 피구왕은 아이들에게라도 인기가 많다. 족구왕은 예외다. 족구는 잘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면에서 족구는 청춘과 비슷하다. 무용(無用)한 것이고, 돈이 별로 안 들어도 재밌으며,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한다. 우문기 감독은 “(여학생이 많은) 미대를 다닌 데다 군대도 카투사로 다녀와서 이 영화를 찍기 전까지 족구를 해본적이 없다”고 했지만, 이 영화는 족구로 청춘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저희 학번(그는 03학번이다)에서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며 막걸리를 마신다거나 복학생들이 족구를 하는 것은 이미 전설이었어요. 주위에 족구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족구선수 출신의 무술감독과 족구협회에 자문을 구했어요. ‘팩차기’는 자료를 찾으면서 알게 됐고요. 시사회 때 족구협회 회원들을 초청했는데 이사장님이 족구를 희화화한 것 빼고는 마음에 든다고 하셨어요. 족구를 다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면서요.”
만섭은 촌스러울 정도로 순박하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다.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먼저 말을 걸어 마음을 표현하고, 좋아하는 족구를 할 때는 발에 피가 나도록 공을 찬다. 만섭의 라이벌 강민은 그와 반대다. 잘생겼고 인기가 많지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쿨’하게 보이고 싶어서 좋아하는 여자를 여자친구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면, 남들 몰래 고시원에 살면서 학교에는 벤츠를 몰고 다닌다. 우문기 감독은 “강민처럼 허세 가득한 인물을 통해서 대변하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알에서 깨어 나오지 못한 사람이다. 깨어날 수 있고, 깨어나야 하는데 겁이 많아서 그러질 못하는 친구들을 많이 봤다”고 했다. “영화 볼 때 너무 웃긴 데도 남들 눈치 보느라 못 웃은 적 있지 않나요? 저는 예쁜 여자애 좋아하는데 짝사랑만 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남들 눈치만 보고 살면 너무 불행해질 것 같아요.”
주성치와 벤 스틸러를 흠모
‘청춘영화’의 새로운 전범(典範)이 될 만하지만, 이런 타이틀에 갇히기는 아까운 영화다. 웃겨서 코미디, 가슴이 떨려서 멜로이고, 운동경기 장면이 영화의 절반이라 스포츠 영화이며 시공을 초월한 캐릭터 설정 때문에 SF이기도 하다. 중국어과 학생들이 무술하듯 족구를 하는 것이나 공을 바닥에 내리꽂으면 불꽃이 튀는 만화적인 설정은 주성치의 영화 <소림축구>나 미노루 후루야의 만화 《이나중 탁구부》를 연상시킨다. 우문기 감독은 “학교에서 다들 좋아하는 영화감독으로 장 뤽 고다르 같은 거장을 꼽을 때 난 주성치와 벤 스틸러를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흑백 영화는 본 적도 없고 <포레스트 검프>나 <나 홀로 집에>처럼 코미디가 묻어 있는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가 앞으로도 지키고 싶은 소신은 “연소자 관람불가의 영화를 찍지 않겠다”는 것. “아들도 보고, 장인 어른도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다른 감독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시네키드는 아니었어요. 지금도 피가 나오는 영화는 잘 못 봐요. 만화책을 더 좋아하는 편이죠. 《멋지다 마사루》 《이나중 탁구부》 《H2》 같은 만화를 즐겨봤어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이런 만화를 언급하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아요.”
우문기 감독은 홍대 영상디자인과를 다니면서 광고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개인 작업이 많았고, 그는 여기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학과에서 영화를 찍는 선배들이었다. 그들이 종종 후배들을 동원해서 촬영했는데, 우문기 감독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작업하는 것”을 보고 영화에 관심이 생긴 그는 학부 졸업 후 2011년 힌국예술종합학교영상원에 입학한다. 거기에서 만난 동기 4명과 함께 만든 영화창작집단이 바로 <족구왕>의 제작사인 ‘광화문시네마’. 이들은 2012년 함께 휴학을 하고 월세방을 얻어서 책상 5개를 놓고 영화작업에 들어갔다. 한 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면 나머지 4명이 촬영이나 편집 등을 도와준다. 그렇게 한 작품이 완성되면 다른 한 명이 연출을 하고, 나머지 4명이 영화제작을 돕는다. ‘품앗이’ 같은 방식으로, 5명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감독을 맡는 것이다. ‘광화문시네마’의 첫 작품 <1999 면회>(감독 김태곤)이 작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두 번째 작품 <족구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우문기 감독은 “광화문시네마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설령 내가 훗날 상업 영화감독으로 성공한다고 해도, 다시 이곳에 돌아와 작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실패했을 경우에도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는 임권택 감독님 말고는 활발히 활동 중인 노장 감독이 없잖아요. 할아버지·할머니가 돼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곳을 만들어놓은 셈이죠.”
<족구왕>은 20대의 현실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탄탄한 시작이 있기에 만섭과 친구들이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웃음을 유발해도 유치하지 않다. 냉소나 자조가 아닌 건강한 웃음이다. 시종일관 웃기는 와중에 ‘족구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변화구가 아닌 직구로 던진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만섭이 짝사랑하는 안나에게 하는 말)